번역의 탄생 -  이희재 지음/교양인 |
번역서를 살때는 늘 조심스럽습니다. 인터넷에서 선뜻 번역서를 사기 보다는 꼭 서점에 가서 몇 페이지라도 넘겨보고 차라리 원서를 사는게 나을지 고민합니다. 예전에 어려운 외국 번역서를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던 것이 꼭 내 이해력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몇번의 경험이 가르쳐줬기 때문이죠. 이번에 회사에서 영어 책을 번역하는 일로 초벌 번역본을 감수하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난감함을 또다시 느꼈습니다. Every Team is only as strong as its weakest relationship. 이라는 책의 첫문장을 번역자는 '팀의 역량은 인간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했더군요. 의미의 한 80%는 전달되는 것 같으나, 원문의 Only.. weakest ..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미묘함은 고스란히 빠졌습니다. 근데 막상 직접 고치려니 표현이 머릿 속에서 맴맴 돌뿐 글자로 튀어나오질 않더군요. 그런 답답함을 혹시 '번역 해설서/강의서' 같은데서 풀 수 있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골랐습니다.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샀으나, 오랜만에 맛보는 묵직한 맛의 책입니다.
저자는 책의 초반에서 원문보다는 번역하고자 하는 '도착어(국어)'에 충실한 번역, 품사나 단어 하나하나를 곧이 곧대로 번역하기보다는 읽는 이가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감히 의역할 수 있는 번역이 좋다라고 밝힙니다. 저자가 20년간 번역을 하면서 머리로 느끼고 몸으로 익힌 '거장의' 표현들을 엿보는 즐거움은 기본입니다. 책의 부제인 '한국어가 바로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는 제가 여지껏 본 것 중에서 단연코 수작입니다. 책의 내용과 느낌을 너무도 절묘하게 표현하더군요. 군데군데 보너스로 제공하는 '영한사전에 없는 풀이말' 섹션에서 무릅을 탁 치게 만드는 생생한 표현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사전에 풀이말로 등재되었으면 싶을만큼 좋더군요. 번역을 하다보니 한국어를 더 잘 알게되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과 작금의 번역 세태 및 현재 영한 사전에 대한 '울분(?)'은 외래어와 인터넷 채팅체가 난무하면서 맞춤법조차 흔들리는 한국어가 바로 설 수 있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16장 이후부터 동아시아의 3개국어와 영한사전의 편찬 유래 및 영국/미국 사전의 차이를 역사, 사회, 언어의 시각에서 조감하는 부분은 기대 이상의 보너스입니다.
처음 한국에서 외국어 사전이 편찬된 것은 1890년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라는 선교사는 Butter를 소젖기름으로, Cheese를 소젖메주라고 번역을 했다고 합니다. Dismember는 '육시하다, 능지처참하다'라는 당시 조선시대 상황에 맞는 말로 바꾸어 놓은 거죠. 이제 버터나 치즈가 거의 차용화된 요즘에 보면 촌스럽기도 하고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모를 표현이기도 하나 외국의 언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만은 높이 살만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전통 어휘가 더 많았습니다. Anniversary-돌, cancel-탕감하다, deliberately-부러, needlessly-공연히 등 좋은 풀이어가 많았던 거죠. 그런데 해방 이후 편찬되는 사전들은 대개 일본에서 만든 영일사전을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거의 반세기 동안의 일제 통치를 막 겪고 난 이후이니만큼 당시 영한 사전을 볼만한 지식인들은 일본어에 능통했고 그런 독자의 상황을 고려하여 일본식 표현이 대거 사전에 수록되는 계기가 되었겠죠.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한자로 어렵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풀이가 발음만 한국어로 표기되어 그대로 실리다보니 온통 한자어투성이의 사전이 되버렸습니다. 반면 북한은 '영조사전(영어-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면서 철저히 토박이말에 의한 풀이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영한사전에는 '수축, 축소, 제한하다'라는 뜻으로 나오는 contract를 영조사전에는 '조이다, 찌푸리다, 좁히다, 오그리다, 줄이다'같은 고유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표현 자체도 'No mill, No meal'이라는 속담을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는 직역투로 번역되어 있다면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본래의 의미로 번역한 것이죠. (원문 내용 차용)
책의 구성상 중간중간에 설명이 중복되고, '강의' 같은 내용을 '에세이'같은 형식으로 풀어내느라 정작 나중에 다시 써먹으려고 내용을 살펴보기 곤란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아마도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아시아 국가의 사전 역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는 저자가 작업을 마치시고 나면, 100년전 언더우드 선교사가 펴낸 사전과 북한의 영조사전보다 훨씬 더 좋은 영한사전, 번역 지침을 다시 펴내시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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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ndyko.egloos.com2009-03-27T10:37:060.31010